a.건축에서 많은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표현이 혼란스럽다는 신호지만, 건물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강한 아이디어는 질서와 통제의 징표이기 때문입니다1
b.모든 쓸모없고 가여운 물건들, 안타까운 형태들, 과거의 망령이 되어버린 기구들, 방황하는 기능들. 비합리적인 기능들에 작별을 고한, 더이상 발탁되지 않는 사물들. 그리하여 떠오르는 비생산적이며 과잉된 잉여 속의 발견들
c.영원한 것은 고고학에서 연구되는 도시의 흔적을 통해 들려주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로마제국의 주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는 근간은 폼페이의 전형적인 로마주택이다. 지금으로부터 만 년 후 인류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을때, 고고학은 우리를 대신해서 말해줄 것이다. 가장 많은 인구를 수용했던 건축 유형이 증거가 되어 우리의 문화를 나타낼 것이다. 왜 그렇게 엄청난 크기의 빌딩이 필요했었는지의 이유를 말이다. 우리는 미래의 역사를 미리 쓰기 위해서 더 많은 건축사례가 필요하다...외계인: 어느 쪽이 건축이야? 이쪽? 저쪽? (건축학계에서 논의되었던 주요한 형태적 개념과 건축유형의 대표적 고고학적 발견물의 비교사례를 가리키며)2
d.그러나 쓰임새라는 즉물적 차원을 초월하는 이 탑의 미학적 상징적 기능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_미헐 데 클레르크Michel de Klerk3

e.문학은 더 이상 세계의 재현과 모방인 미메시스(Mimesis)도, 세계의 인지 수단인 마테시스(Mathesis)도 될 수 없으며 그것은 다만 언어의 불가능한 모험인 세미오시스(Semiosis), 즉 텍스트가 될 수 밖에 없다....소쉬르로 대표되는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작품(oeuvre)은 단일하고도 안정적인 의미를 드러내는 기호체계라면, 이런 고정된 의미로 환원될 수 없는 무한한 시니피앙들의 짜임이 곧 텍스트(texte)이다. 텍스트는 작품의 분해가 아니며, 텍스트의 상상적인 꼬리가 바로 작품이다. 혹은 텍스트는 작업이나 생산에 의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텍스트는 결코 멈출 수 없다. 텍스트의 구성 운동은 횡단(traversee)이다. 특히 그것은 작품을, 여러 작품들을 관통할 수 있다. 텍스트는 언술행위의 규칙들(합리적인 것, 읽혀질 수 있는 것)의 한계까지 나아간다…텍스트는 정확히 일반 견해(doxa)의 경계 뒤편에 위치하고자 한다. 텍스트는 언제나 반론적인(paradoxal), 즉 일반 견해 밖에 있는 것이다4

f.단순히 사물의 물리적인 재현mimesis은 누군가 잊지않고 재현했다는 그 사실 자체 이상의 의미를 찾기 힘들었다. 반면 미니멀건축은 재현하지 않고자하는 집착을 통해 마침내 재현하지 않음만이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g.눈에 보이는 논리가 그 구조의 실제 비헤이비어(behavior)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얘기, 그런 게 미스를 근거리에서 모시면서 내가 터득한 그런 원칙이지, 말하자면5

h.이곳저곳, 이쪽저쪽에서 들은 것들-지식인으로서 사회를 향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 Respose라면, 그럼으로써 그에 따르는 무게감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은 Responsability, 곧 지식인으로서 짊어질 책임감이다

i.만일 우리가 어떤 오브제가 지닌 개념을 갖지 않으면, 그 개념은 해석불가하고 “불투명”한 것이 된다...새로운 절단, 새로운 외곽선은 새로운 영역을 그려낸다6

j.초현실주의는 환상으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겠지만 인간성을 손상시키는 모든 모순이 마치 꿈 속에서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처럼 초현실로서 설명될 수는 있다...발견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인생을 가능성의 세계로 전환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7

k.접속하는 항이 달라지면 다른 기계가 되고 다른 욕망이 작동한다. 입이 성대와 접속하면 ‘말하는-기계’가 되고, 식도와 접촉하면 ‘먹는-기계’가 되며, 생식기와 접촉하면 ‘섹스-기계’가 되는 식이다. 모든 사진은 ‘어떤’ 사진이기에 앞서 ‘그냥’ 사진임을 말하고 싶었다8

l.예술가라면 치우침이 없어야 한다. 즉 재료의 가치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작품으로 재료를 지배해야한다 9

m.법률과 풍습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문명의 한복판에 지옥을 만들고 인간적 숙명으로 신성한 운명을 복잡하게 만드는 영원한 사회적 형벌이 존재하는 한, 무산계급에 의한 남성의 추락, 기아에 의한 여성의 타락, 암흑에 의한 어린이의 위축, 이 시대의 이 세 가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어떤 계급의 사회적 질식이 가능한 한, 다시 말하자면, 그리고 넓은 견지에서 말하자면, 지상에 무지와 빈곤이 존재하는 한, 이 책 같은 종류의 책들도 무익하지는 않으리라. 1862년 1월 1일 오트빌 하우스에서10

n.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태도라는 것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불화를 외피로 삼아 뭔가를 긋고, 칠하고, 다듬다 보면 어느 시점에선가 그것은 더 이상 불화가 아니게 됩니다. 결국 화면은 강박적인 꾸덕임이 지배하는 어떤 집착의 산물로 가득 차 버립니다. 그리고 이것이 허물(Dummy)이었음을 깨달았을 때, 저는 이 그림들을 비로소 '귀불(Dummy Budda)'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11

o.인간의 고귀함과 아름다움에 대해 말할 때 그 인간과 더불어 태어난 악한 본성을 함께 말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빛과 어둠이 서로를 떼어놓고는 볼 수 없는 것처럼, 돌의 충만한 상징성은 필연적으로 돌이라는 허무를 동반한다...더군다나 새가 된 돌은 전시가 끝난 뒤에도 돌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생각해 보라. 그것이 배역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돌이 무슨 수로 알겠는가?...비밀 하나. 자세히 보면 모든 돌은 당신의 얼굴과 조금씩 닮아 있다...오늘날 예술의 본령은 어차피 좋은 붓이 되는게 아니라 캔버스의 외곽선을 지우는 지우개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12

p. 그것은 인터페이스라는 개념일 것이다. 여기서 이 개념은 컴퓨터 스크린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행동 반경을 넓혀가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공 환경의 접촉면을 지시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것은 일상 문화와 테크놀로지 사이에서 인터페이스의 물질적 구성에 관여하는 사회적 실천으로 재정의되고, 감각적 지각, 언어적 소통, 신체적 행위를 아우르는 당대의 경험 형식을 변형하거나 복제하는 역할을 떠맡게 되는 것이다...입체파가 다중적인 시선으로 표면들의 관통과 접합을 표현하여 재현의 인터페이스로서의 투시도법의 유효성을 의문시했던 반면...이렇게 투시도법이 건축가의 필수 덕목이 되면서 건축은 점차 건물의 생산과 매매과정에서 분리되어 독자적인 전문 활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다13-1

q.여기에서 잠시 ‘숭고 the sublime’라는 칸트의 미적 범주를 살펴보자. 기능의 범주를 발명하기 이전 초기 모더니스트들은 테크놀로지의 관계 속에서 디자인의 당대적 의미와 역할을 정의하는데 이 범주를 자주 활용하곤 했었다. 칸트에 따르면, 본래 숭고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대상이 갑작스럽게 출몰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무기력감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우리 눈 앞에 놓인 어떤 대상으로 하여금 ‘형언할 수 없는’의 감정을 유발할만큼 압도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숭고의 대상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그는 컴퓨터의 외형이 미스 반 데어 로에의 건축물처럼 엄격한 논리를 갖춰야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폴 랜드의 로고를 디테일로 간직한 IBM의 컴퓨터들은 강철 프레임에 몸체를 지탱하고 애나멜을 입힌 금속 패널로 내부를 감추고 있었다. 커튼월 건축을 연상시키는 외형으로 인해, 사무실에 배치된 IBM 컴퓨터들은 마천루의 축소 모형처럼 연출되었다...나는 미래의 가정이 오늘날의 가정보다 과거의 가정에 보다 가깝지 않을까 예측한다. 오늘날 가정을 채우고 있는 블랙박스들은 사라질 것이며, 의자, 탁자, 침대처럼 좀 더 오랜 역사를 지닌 사물들이 무대 위에 오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물들은 태곳적부터 특정한 형태로 우리와 함께 생활해왔으며, 그 기능은 나름의 본질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13-2

r. 1.진도구는 실제적인 사용을 위한 것이 아니다 2.진도구는 분명히 존재한다 3.모든 진도구는 근본적으로 무정부주의적이다 4.진도구는 일상생활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5. 진도구는 판매를 위한 상품이 아니다 6.진도구 제작에 있어 유머 만이 유일한 동기가 아니다 7.진도구는 선전하거나 선동하지 않는다 8.진도구는 결코 금기가 아니다 9.진도구는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10.진도구는 선입견을 갖지 않는다. 진도구는 순수외관의 반대편에서 ‘순수기능’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진도구는 가능한 범위 안에서 가장 복잡하고 특수한 방식으로 필요와 기능의 인간중심적인 방정식을 내파한다...진도구의 관심사는 변신로봇이 무엇으로 변신하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복잡한 절차를 거쳐 변신하느냐에 초점을 맞춘다13-2

s.때가 되었다. 로켓들이^조준되고^달과 화성에 착륙한다^별들에^독이 뿌려질
  DET ER PA TID, Rakettar stikk^snutane upp^og medar pa manen og Mars^Det er pa tid^det er pa tid^a sa si gift millom stjernone14

t.나사의 우주개발 초창기에 사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은 과학적  데이터와는 거리가 먼 현장 스케치 정도였다. 그러다가 아폴로계획을 통해 달에 가면서 사진의 중요성을 알게 되고 핫셀블라드에 70밀리 필름을 쓰는 특수한 카메라를 주문하는 등 사진에 정성을 쏟는다. 그러면서 이미지의 빅뱅이 제대로 일어난다. 우주인들은 이제껏 인간이 가보지 못한 곳에서, 인간이 본 적 없는 강렬한 태양 광선 아래 사진을 찍어 온다. 특히 1968년 아폴로 8호에서 찍은 최초의 지구출(earthrise), 즉 달의 지평선 너머로 지구가 떠오르는 장엄한 광경은 몇 만 년을 변함없이 일출이나 월출만 보아오던 인류에게 새로운 우주를 열어준 사건이었다. 그것이 바로 망막에 일어난 빅뱅이다15

u.그렇게 해서 내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게 된 7인의 사무라이는 무언극의 배우들처럼, 뭔가 말하려는 게 없는 것 같았고 실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말 못할 사정이 있어서는 아니고, 말이 필요 없는 듯 아무 말도 없이, 표정도 필요 없는 듯 표정도 없이, 울음이나 웃음은 생각도 할 수도 없다는 듯이 울거나 웃지도 않고 싸웠다. 나는 오로지 싸우기 위해서 싸우는 것 같지는 않고,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고, 그래야만 하는지도 알 수 없고, 달리 방법이 없는지도 알 수 없는, 긴 머리를 묶고 어느 정도 사무라이 모습을 한 7인의 사무라이가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낭만적인 고요한 벌판에서 뚜렷한 이유는 없이, 어쩌면 세상이 너무나 하얗다는 이유로, 서로를 칼로 베며 붉은 피를 눈 위에 멋있게 뿌리지는 않고, 여기에는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다는 듯 서로를 칼로 베는 시늉만 하며 벌이는 듯한, 흐지부지하고 지루한 싸움 같은 것을 지켜봐야 했다16

v.ENVIRONMANTAL QUESTIONS to technical experts, but approached the assignment with a particular position. in his opinion, the energy efficiency of the design should not depend on construction and building technology, but should be understood as an ARCHITECTURAL PROBLEM, an integral part of the design...this is where the architect can become inventive in his design. if he does not want to rely on the engineer alone, he has to take the intellectual initiative himself, so that the idea behind his designs becomes visibl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autonomy of architecture, energy-consicious architecture is important in that it includes the possibility of new architectural concepts. specifically, it is about developing so-called “passive systems,” which include above all the question of orientation, the creation of different climatic zones in the form of buffer zones, the minimization of the outer wall surface, the use of different materials such as greenery, glass, stone and earth, and the question of the specific organization and form of the floor plans and the creative implementation of these elements in a CLIMATICALLY ADAPTIVE ARCHITECTURE17

w.종이 울렸다. 단 세번의 짧은 비명. 그 순간의 찰나에 모두가 재빠르게 자리를 찾아 앉았다. 두세번의 눈깜빡임과 동시에 교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강박적으로 쥐어뜯은듯 머리가 헝클어지고 너저분한 선생님이 들어오고, 모두, 일동 경례! 그리곤 일제히 책을 편다.

Modern Times. 모던 타임즈

출석번호 13번이 일어나 책을 펼친다. 모두가 들리도록 큰 목소리로 읽는다. 우리는. 우리는! 따라 읽는다. 노동에 속박되었던 과거의 영광을, 그 위대했던 순간을 공부하기 위해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몸의 기계적 반복을 더이상 부정하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지나친 자유를 이제 거부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는 모였다.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권리를 기계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제 그들은 이기적으로 우리에게 기회를 주지 않는다. 몸은, 더이상, 쓸모없다. 그리하여 다시 사회의 최전선에 배치되어 다음 세대를 위해 기꺼이 노예가 될 준비를 마친 우리들은 두 팔의 병적이고 반복적인 움직임의 아름다움과 피땀의 숭고함을 17페이지 마지막 문단, 아름다운 흑백사진과 함께 배운다

x.나는 타자의 언어를 통해 형성된 주체성을 경험하는 주체로서 스스로를 인식한다. 나는 타자가 나에 대한 경험을 나에 얽힌 서사의 구조 안에 얽히고 또 내포된 경험으로서 퍼뜨리는 방식을 경험한다. 나는 타자의 세계에 특정한 방식으로 속한다. 나는 바깥에 자리 잡고 앉아 안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보다, 나는 타자의 경험의 구조 안에 위치하며 그 안에서 스스로를 바라본다...GPT-3를 훈련하는 데에 쓰인 45TB 가량의 플레인 텍스트로 집약된 ‘인터넷’의 개념-이것이 바로 작품 속에서 GPT-3가 언급한 “집단 무의식 개념의 초공간적 버전”일지도 모른다...번역적 임베딩...그렇다고 해서 컴퓨터 생성 텍스트가 고질적인 번역의 문제를 동반한다는 느낌은 단순한 인간 중심적 불안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컴퓨터 생성 텍스트를 번역하는 행위는 번역 개념의 확장이지 번역 행위의 확장은 아니다. 이러한 확장은 번역하는 행위와 번역물의 지각 사이의 간극에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간극의 번역의 주체와 객체가 소통하는 영역이다. 이러한 소통의 영역은 장력의 영역이자, 모순의 영역이다. 이는 번역 그 자체의 영역이다. 번역하는 행위는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며, 모순이 타협될 공간을 창출하는 역할을 한다...번역하는 행위는 곧 탐구하는 행위이다...언어는 변화를 거듭하고, 컴퓨터 생성 텍스트 또한 마찬가지다. 역자는 문화적 변화와 기술적 변화에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텍스트는 동일한 상태에 머물지 않고, 진화하며, 변화하고, 또 변형된다. 역자로서, 우리는 텍스트와 함께 진화하고자 해야만 한다. 우리는 번역하는 언어를 비롯한 모든 문화 형식들을 역동적이고 상호 의존적으로 바라봐야만 한다. 번역 역시도 다른 문화 행위들과 공존하려면 역동적이고 상호 의존적이어야만 한다18

y.10년 전까지만 해도 만산 계곡 탑들이 늘어선 공간에는 조각논들이 이어져 있었다. 운주사가 폐사된 이후 오랫동안 인근의 농민들이 그 좁은 빈 땅에 농사를 지어왔고, 그리하여 불교유적이 자연스레 생산활동과 어울리게 된 것이다. 힐트만 교수가 매료된 대로 운주사터는 고려시대 신성한 불교의 성지이면서, 석탑과 석불들이 배열된 야외조각장이고, 먹고살기 위한 농토였던 것이다...계곡 서쪽에 1m 20cm 높이 미륵 머리가 땅에서 튀어나와 있다. <분포도>에서 10번. 그 사이 이 미륵 두상은 파손되어, 하늘로 얼굴을 향하고 땅바닥 위에 평평하게 놓여 있는데, 이마 위가 손상되어 있다. 얼굴에는 눈들의 선이 나타나 있지 않다. 눈썹을 나타내는 두 개의 곡선이 눈들의 선과 하나를 이루며, 코허리로 이어져 있다. 이 선이 좁은 코를 지 탱하고 있다. 그 아래 입은 아주 작은 꽃잎과 같다. 전체 머리 모양은 하나의 큰 꽃잎과 같다. 양쪽 귀는 가장자리에 좁은 선을 두른 사각형 모양으로 타원형의 '안엽' 뒤에 있다. 꿈꾸는 듯한 한국적인 얼굴이다. 나는 이 모습을 바라보며 미륵불이 땅 속에 함몰된 채 서 있다는 인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땅에서 고개를 내놓고 꿈을 꾸고 있다.
이 가운데 도대체 어느 것이 유일하게 옳은 번역인가 하고 묻는다면, 우리는 일의성(一義性)을 요구하며 다양한 형태 중 오직 하나만을 옳은 것으로 간주하려 드는 서구식 습관에 빠지게 될 것이다...이제서야 비로소 나는 천불동을 내 기존의 세계관의 틀 내에서 파악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세계관의 틀 내에서만 사물을 파악할 수 있다. 오직 어린아이의 삶만이 분리됨이 없이 이쪽저쪽을 넘나들 수 있다. 어린아이의 삶은 한 풍경의 이끼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 풍경은 이성(理性)과 타산적 오성(悟性 )이 자라면서 비로소 객관적이 되어 육체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세계관의 틀은 온 주의력을 요한다. 여기에는 머무를 수 있는 어떤 장소도 표시되어 있지 않다. 어쩌면 이쪽 혹은 저쪽 방향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경계선이 표시되어 있을 수는 있다. 우리 세계관의 틀은 운동의 소진선(消盡線)이요 지극히 어려운 수수께끼다...천불동 운주사에 관한 한, 보증된 지식 대신에 언제나 전설의 구조가 등장한다. 따라서 이 텍스트의 구조를 일직선적인 사상적 기표들로 용해시킴으로써 지식을 얻으려는 의지를 지닌 사람에게는 이 책은 임의적인 유희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미륵의 장식들은, 모이지 않으면서 자신을 내맡기고, 풀려고 하지 않고 그물에 걸리듯 사로잡히는 것에서 자신의 형상을 이루며, 오로지 자유로운 유희로서 출현하는 바로 그 엄격함 속에서 자신을 나타낸다. 연대기적으로 연대를 적을 수도 없고, 고고학적으로 공략해 들어갈 수도 없이, 이 돌들은 언제나 돌발적 사건으로 머문다. 그들의 장식을 다루려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건이 될 것이다. 그들을 이어주는 역사는 시작도 끝도 모를 것이다19

z.한마디로, 포룸은 각 가정집의 아트리움이 그렇듯이 도시 전체를 위한 일상시설이 잘 갖춰진 일종의 메인 홀인 것이다...그때마다 좌우에서 달려드는 차량을 피하기 위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건물 파사드가 쭉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보행자들을 자연스럽게 보호할 수도 없다. 소위 산책로들이 발달된 도시라면 어디에서나 보행자의 측면을 따라 건물 파사드들이 끊어지지 않고 길게 이어지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차례의 일부 발췌 I.건물, 기념비 그리고 광장 사이의 관계 II.광장 중앙 비우기 III.닫힌 공간으로서 광장 IV.광장의 규모와 형태 V.옛 광장의 불규칙성 VI. 군집한 광장 VII. 북부 유럽의 광장 구성 VIII.현시대 도시설계에서 모티브의 빈곤과 무미건조함 IX.현시대의 체계 X.현시대 도시설계에서 예술의 한계 XI.현시대의 개선된 체계 XII.예술적 원칙에 따른 도시정비 사례20

a.눈이 내렸다^소복하게 하얀 카페트가 깔리길 기대했건만, 기어코 하늘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세상의 기능이 불능이 되었도다. 마비되었도다

b.능력주의와 아빌리파이-수년의 연구 끝에, 조현병의 환청이나 망상과 같은 증상을 조절하면서도 부작용은 대폭 줄인 획기적인 신약, '아빌리파이 (Ablify)가 개발되었다. ‘아빌리파이’라는 이름은, ‘능력’을 의미하는 ‘어빌리티(albility)’에 동사형의 어미(fy)를 붙여 만들어낸 것이었다. 복용자에게 ‘능력을 발휘하게 해주겠다(Ablify)’는 그 자신만만한 이름처럼, 이 약물이 정신약리학 역사에서 지니는 위상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후 아빌리파이는 ‘3세대 항정신병 약제’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로 분류되기에 이른다
약물화된 나, 약물화돠지 않은 나:매드프라이드 운동과 아빌리파이의 충돌-아빌리파이는 여러 신경전달물질 수용체(receptor)와 상호작용하며 '비정신장애인의 세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나’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신약이었다. 그러나 그 신약이 전제하고 있는 '다른 나’의 '원래의 나'에 대한 우월성을 거부하는 운동이 바로 매드프라이드 운동이었다. 매드프라이드 운동가들에게 광기란 나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질환도 아니며, 내가 치료하길 원하는 증상의 집합체도 아닌, 내 정체성의 한 측면이었던 것이다
정상성의 수호자에서 ‘화학적 사이보그’로: 아빌리파이는 ‘무엇을’ 가능하게 하는가-우리는 당사자의 몸과 ‘바깥으로부터 결합하는 기계’와 ‘내부로부터 결합하는 약물’이 연속선상에 놓일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몸-약물-기계 사이의 결합으로써 장애를 바라보려는 이러한 시도를 확장하여, 뇌와 정신과 약물이 결합하는 생화학적 작용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수는 없을까? 필자는 정신과 약물이 우리의 뇌 속 무수한 신경전달물질 수용체와 결합한 상태를 ‘화학적 사이보그(chemical cyborg)’라는 이름으로 호명하며, 새로운 정신약물학 윤리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그러나 ‘화학적 사이보그’의 관점을 통한 해방적 약물학 세계에서는, 약물은 더 많은 사이보그적 실천을 가능케 하는(Abilify)자유 확장의 도구로 작동한다. 약물이 케미컬로, 정상성이 다양성으로, 수동적 환자에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화학적 사이보그로 변화하는 순간, 정신의학의 축은 당사자에게로 옮겨가고 새로운 약물학의 가능성이 열린다21

c.졸업설계 프로젝트는 여러 차례 그 주제와 대상이, 심지어 대상지까지 숱하게 변경되면서, 결국 러브호텔에서 시작되어 찜질방으로 마무리되어버렸습니다. 졸업설계 프로젝트는 그간 배워온 프로젝트를 관통하고 강제하는 하나의 명확한 개념으로서의 건축이 아닌 다양한 주제와 생각들이 혼합되거나 혼재되어버린채 끝나버렸고, 결국 저는 아직까지도 이 프로젝트를 명확히 하나의 아이디어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처음에는 그러기가 난해하고 불가능하다가, 서서히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는 선명해졌지만 그 동시에 그러고 싶진 않은 프로젝트가 되었습니다. 긴 시간동안 흩뿌려두었던 여러 생각들을 하나씩 다시 더듬어가는 과정을 실무를 하면서 틈틈히 밟아왔습니다. 마침내 저는 비로 텍스트의 즐거움the pleasure of texts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질서와 통제를 벗어나 따로 부유하는 ’텍스트‘들은 프로젝트를 관통하고 강제하는 ‘개념’ 속에서 즐거이 이리저리 헤엄치면서 애써 박아놓는 경계를 장난스레 건드리고 일의적 프로젝트를 다의적 차원의 프로젝트로 확장시켰습니다. 그럼으로써 개념이라는 것은 레이어의 속성을 가지고, 덧대고 언제든 그 위에 쌓아 올릴 수 있는 무언가가 되어버립니다. 프로젝트는 여러 침투를 허용해버리는 취약한 상태가 될지도 모르지만, 달리 보자면 다양한 함의를 수용가능하고 주변과 공명할 수 있는, 결국엔 지속가능한 영속성을 부여하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저는 다른건 몰라도 반년 남짓의 일회성 프로젝트로 마무리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만큼은 성취하였습니다.

d.스페이스정크space-junk가 우주에 버린 인간의 쓰레기라면, 정크스페이스junk-space는 지구에 남겨둔 인류의 찌꺼기다. If space-junk is the human debris that litters the universe, Junk-Space is the residue mankind leaves on the planet. 근대화가 건설한 생산물은 근대 건축이 아니라 정크스페이스다. 정크스페이스는 근대화가 진행되는 동안에 응고된 것 혹은 근대화의 낙진이다...정크스페이스는 그것의 정점 혹은 붕괴점이다...그것의 개별 부분들은 기발한 발명의 결과물로서, 인간의 지성에 의해서 명료하게 설꼐되고, 면밀한 계산을 통해 추진되었으나, 그 모든 것의 총합은 결국 계몽주의를 종식시킴과 동시에 하급 연옥과 같은 소극笑劇으로 부활했다...정크스페이스는 우리가 이루어낸 모든 것의 총합이다 22

d-1.As you may know, in various theories “space junk”is the debris that is created by different satellite and planetary ventures. In a way, all the world relies on has the same junk status-Junk space. It is not a negative term, but just the kind of term that defines the expectations and the properties that architecture can have today-Rem Koolhass and Hans Ulrich Obrist(2006)

e.나는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안in”에 있고자 골몰하는 카리스마적인 포스트비판의 저 모든 (접두어들), “포스트post”  “신neo”  “전위avant”  “트랜스trans” 따위가 지긋지긋하다. 이들과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밖out”에 있는 게 아니라 [옆으로] “빗겨 나off”있기. “무대 뒤편off stage”에, “음정이 안맞게off key” “엇박자로off beat,” 그리고 가끔은 “저속한off-color” 모습으로...모험이 제공하는 것은 뒤집힌 미메시스의 가능성인바, 강렬한 상상은 자연을 모방하는 대신에 미래의 건축을 제안한다...모험의 건축은 문지방, 임계 공간, 다공성, 문, 다리 그리고 창문의 건축이다. 그것은 숭고의 경험보다는 한계의 경험에 관한 것이다 23

f.만일 도시가 거대한 주택과 같으며 또 주택이 작은 도시와 같다면, 주택의 다양한 부분들은 축소된 건물들처럼 인식될 수 있지 않을까?-레온 바이트스 알베르티...건축은 ‘유니쿰(unicum)’, 즉 주위의 배경과 단절적 오브제의 고유성에 기반하며 서로 경쟁적이다. 반면 도시는 시간의 층위와 흔적이 축적된 집합적 생성체로서 타협적이면서 자연발생적이다. 따라서 건축과 도시는 대립적일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과 도시는 -대립적이든 혹은 상호적이든- 서로 얽혀 있는 직물적인 관계이기도 하다...많은 현대 도시들이 스스로를 예술 작품처럼 여기며 도시적 ‘유니쿰’을 갈구하면서 ‘바탕 없는 형상(figures without ground)’ 같은 랜드마크 건축들의 카니발이 기꺼이 되고자 하기도 하지 않는가. 그리고 오늘날 어떤 건축에서는 ‘형상들 없는 바탕(ground without figures)’의 일부가 되길 선호하며 평범하고 일상적인 생활용 건물이 되는 것에 만족하기도 하지 않던가24

g.When you want to work on a new architectural idea, the first thing you need to formulate is a new idea of drawing architecture. I do believe that the political sometimes lies in these seemingly marginal aspects of the profession, in how you construct a drawing, how you craft the meaning of your drawing25

h.<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사람이 상황을 이겨 낼 힘을 기르지 못한 것을 다 같이 지켜보아야 하다니, 이것은 남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충격적인 사건이다. 무엇보다도 인간적 관심과 예술 분야에서의 사려 깊은 동반이 문제되는 경우에는, 국가 차원의 장려와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결국 비극적 종말의 씨앗은 개인적인 것에 있었던 듯하다. 소박하게 보이는 그녀의 초기 작품들에서 이미 충격적 분열이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사명감을 위해 고집스럽게 조합하는 기교에서, 이리저리 비틀고 집요하게 파고듦과 동시에 지극히 감정적이고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를?>26

i.여전히 가속도는 줄지 않았다. 이제는 거의 초속 2천 킬로미터 이상으로 날아가고 있었으므로 태양의 인력권에서 벗어나는 것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노턴 선장은 마침내 라마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라마가 태양에 접근한 것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였고, 그런 다음엔 또다시 알 수 없는 궁극의 목표를 향해 머나먼 여행을 떠나려는 것이다...여때까지 온 세상 사람들의 마음 속에 도사리고 있던 불안을 비웃기라도 하듯 갑작스럽게, 미처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태양계 밖으로 모습을 감출 것이다..그 기나긴 방랑의 종착점이 어디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라마는 은하수 너머 대마젤란 성운이 아련히 빛나는 우주의 한구석을 향하고 있었다27

i-1.낮과 밤, 그리고 해와 달, 어쩌면 인류는 이분법적 흑백논리로 사고할 수 밖에 없는 기원적 한계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삶과 죽음이라는 생명의 이분법도 스스로 지니고 있다. 이제껏 인류가 쌓아 올린 모든 문화유산이란 실은 이런 형이상학의 테두리 안에서 이룩된 셈이다...우리는 우주 속 인간의 지위에 대해 자뭇 진지한 실존철학 체계를 구축해왔다. 자연과학 분야의 눈부신 발전을 토대로 최근에는 여러 문예 창작물에서 외계의 다양한 지적 존재들을 꽤 세련되게 상상한다. 하지만 사실 그건 모두 우리 인간의 기대나 욕망이 투사된 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27

j.하지만 작가가 얼마나 진지한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작가는 어떤 의미 있는 스타일로 그 의식을 드러내느냐 하는 게 중요하다. 누가 더 뜨겁냐, 하는 당위만이 중요했던 과거 리얼리즘 문학이 미학적으로 도태된 것은 바로 이런 고민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_천명관 / 성질이 같고 밥그릇이 같을 때에 싸움이 일어난다. 진짜 새로운 것은 싸울 이유가 없다_박민규 /  나는 불온함으로 스케일을 만들고 싶다. 급진적인 작가, 이런 평가를 꿈꾼다_은희경 / 소설을 둘러싼 가장 큰 오해는 소설에 있어야 하는 것들로 여겨지는 요소들이 얼마든지 없어도 된다는 것이고, 20세기의 많은 소설들은 그 점을 잘 보여주었어요. 그런 요소들은 소설 속에 없어도 좋고,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없는 소설이 이렇다 할 드라마가 없는 우리의 삶을 더 잘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죠_정영문28

k.프램턴이 비판적 지역주의를 통해 논의한 또 다른 측면은 환기였다. 그가 보기에 환기 방식은 지역 문화의 독특함을 반영한다. 이런 면에서 에어컨디셔닝은 오늘날 만연한 장소감 상실의 주범이다...막힘이 없는 널따란 대지에서든 제한된 부지에서든, 주변 환경의 매력적인 조건들은 건물을 대각으로 배치하도록 요구할 때가 있다. 이는 실제로 건물을 대각선 방향으로 앉힌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내부의 모퉁이에 개구부를 뚫어 주변의 매력적인 요소들을 포착하는 대가 방향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특히 하단 창은 노이트라가 사막의 맹풍violent wind라고 규정한 바람에 대응한다29

l.오늘날 이러한 욕구와 관심사, 가치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 가치에는 세계를 구성하고 질서를 세우기 위한 공공의 합의를 이끌어낼 힘이 없다...학자들은 이 총체적 상황을 놀라운 “개념적 공백”으로 명명했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보다는 새로운 비참조적 세계에 대해 차분하고 침착하게, 해석 없는 리얼리즘으로 다루려 한다...따라서, 새로움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는 사회의 감수성을 인식하는 건축가의 능력이다...’작가-건축가’는 자기 발견을 실험하지 않는다. 또한 자기 중심적이거나 사회로부터 은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건축가’는 사회의 한계를 탐색하는데 최선을 다하기 때문에 그 사회에 대한 진정한 책임을 지게 된다30

m-1.계속 출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그것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나는 병실로 들어가 캐서린이 숨을 거둘 때까지 함께 있었다. 그녀는 의식이 없었고, 숨을 거두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병실 밖 복도에서 나는 의사에게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게 뭐가 있죠?”
“아무것도 없습니다. 제가 호텔까지 바래다 드릴까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잠시 여기 있겠습니다.”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드릴 말씀이...”
‘아니요. 아무 말 안 해도 됩니다.” 내가 말했다.
“안녕히 가십시오. 제가 호텔까지 바래다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수술을 해보니..”
“그 얘긴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호텔까지 바래다 드리고 싶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는 복도를 떠났다. 나는 다시 병실 문으로 갔다.
“지금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간호사가 말했다.
“아니, 들어가겠어요.” 내가 말했다.
“아직 들어오실 수 없어요.”
“당신 나가요.” 내가 말했다. “당신도.” 그들을 쫓아내고 문을 닫고 전등을 꺼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조각상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나는 밖으로 나와 병원을 떠나 빗속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31

m-2.싸움에 지고 엉망이 됐을 때 침대처럼 편안하게 받아주는 친구는 없지. 그의 생각이 계속 이어졌다. 침대가 얼마나 편안한 친구인지 난 미처 깨닫지 못했어. 그런데 자네가 뭐한테 졌지? 그가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난 진 게 아니야.” 그가 큰 소리로 말했다. “다만 너무 멀리 나갔다 왔을 뿐이야.”
그가 조그만 항구로 배를 몰고 들어왔을 때 테라스의 불빛은 꺼져 있었다. 그는 모두가 잠자리에 들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미풍이 지속적으로 속도를 더해가더니 이제 제법 강한 바람이 되었다. 하지만 항구는 조용했다. 그는 바위더미 아래쪽의 조그만 자밭까지 배를 몰아갔다.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그는 혼자 힘으로 가능한 한 바싹 육지에 배를 댔다. 그런 다음 배에서 나와, 바위에 배를 묶었다. 노인은 돛대를 내리고 돌을 감아 말고 이를 묶었다. 그런 다음 돛대를 어깨에 메고 집을 향해 비탈진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자신이 얼마나 지쳐 있는지를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였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거리의 불빛에 반사되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고기의 거대한 꼬리를, 배 뒤편에 곧추 세워져 있는 고기의 거대한 꼬리를 내려다 보았다…오두막에 들어서자 그는 돛대를 벽에 기대어 놓았다. 어둠 속에서 그는 물병을 찾아 물을 마셨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누은 그는 담요를 끌어다 어깨를 감싼 다음 등과 다리를 덮었다. 곧이어 그는 신문지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리고 두 팔을 쭉 펴고 양손의 손바닥을 하늘을 향하게 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32

n.애초에 나는 미술에 단순히 시각적인 것을 뛰어넘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벽에 걸린 이미지만큼이나 우리 머릿속에 형상화되는 이미지도 중요하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 예술은 모호성을 창출하며 한 작품의 의미는 비로소 맥락 속에서 추론될 때가 많다. 그래서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게토의 수퍼스타여, 나는 비트박스 로커, 너는 내 비트에 맞춰 춤을 춰(Chetto Supastar. Iim a Beat Box Rocker and You're Dancing to my Beat.)” 바로 자유다…사람들은 시력을 잃으면 오직 검은색만 보일거라 생각한 다. 눈먼 자들의 세상은 종종 '밤'으로 묘사되곤 했다. 여덟 살에 시력을 잃은 프랑스 작가 자크 뤼세랑(Jacques Lussey ran)이 썼듯이,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조차 시각장애인의 세상을 ‘끔찍한 밤’으로 정의하고 또 그렇게 묘사해 왔다. 뤼세 랑은 이를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 표현에는 눈먼 자들이 마치 세상의 빛으로부터 차단된 존재라는 철학적인 선입견이 담긴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이 표현이 객관적인 측면에서도 잘못된 사실이며, 눈먼 사람의 세계에 있을지라도 빛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한다…시력을 잃더라도 ‘흑암’ 속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붉은색, 갈색, 그리고 검은색이 뒤죽박죽된 어두운 적갈색의 움직이는 듯한 작은 분화구 같은 것이, 즉 몸의 안쪽에서 색깔이 박동하는 이미지를 볼 수 있다. 결코 아무것도 못 보는 게 아니다. 안쪽에서 바깥쪽을 바라보려는 갈망, 그러나 동시에 결코 관통할 수 없는 벽에 부딪히는 느낌과 같다. 마치 시선이 육체 내부에 밀봉된 것 같다. 그런데도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이렇게 인질로 묶인 두 눈에 적응해 가는 것이다… 몇 년 후 나는 나타샤에게 박람회에서 쉽게 판매할 수 있는 작업을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느긋하게 수 많은 못으로 <나는 이런 식으로 일할 수 없어요 (ICant Work LIke This)라는 문장을 박람회 부스의 벽에 박아 넣었다. 그녀는 그렇게 작업하지 않았거니와,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설치 아래에는 망치 두 개와 여러 개의 못이 놓여 있었다. 미술 시장과 그 시장의 요구에 관한 이 풍자적인 보이콧 선언은 역설적이게도 미술 시장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작품은 현재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포함해, 네 개의 최고 수준의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다. 예술가들이 느끼는 감정을 아주 상징적으로 표현하여 많은 기사와 에세이, 학술 논문에서 다루어졌으며, 아직도 내게 이 작품에 대해 문의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물론 나타샤는 다시는 이런 작업을 하지 않았다...처음부터 나는 대안 부동산, 곧 아무도 관심 두지 않으나 잠재성있고 비교적 저렴하게 얻을 수 있는 특별 부동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우리는 프리드리히 스하인의 저수탑 건물, 텅 빈 지하철 역사, 리히터펠데에 있던 여성 전용 교도소, 샤를로텐부르크의 오래된 콘크리트 차고 등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이 중에 적합해 보이는 곳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매우 존경하는 건축가 친구인 아르노 브란들후버(Arno Brandlhuber)가 크로이츠베르크 알렉산드리로의 어느 브루탈리즘 스타일의 교회 건물이 매물로 나왔다고 소개해 주었다. 그는 이 교회를 ‘잔혹하게 아름답다(bruti-ful)’고 표현했다.33

o.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익살이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인간에 대한 마지막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 그런데도 인간을 도저히 단념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 익살이라는 줄 하나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끊임없이 웃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 가까스로 이루어질법한 위기일발,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심지어 제 가족을 대하면서도 그들이 얼마나 괴롭고 또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지 도통 가늠이 되지 않아 그저 두렵고, 그 어색함을 견딜 수 없다 보니 어느새 능숙한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즉 저는 어느 틈 엔가, 한마디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그 무렵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지한 표정인데 저 혼자, 어김없이 기묘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웃고 있습니다. 이 또한 저의 어리고 슬픈 익살의 일종이었습니다.34

p.Living and Working continues a tradition that we can call "typological design," which consists in reforming existing housing types toward alternative forms of habitation. The question of typology has a long history within our discipline. The word type comes from the Latin typus which means figure, symbol, emblem. The Latin term has roots in the Greek tupos, which means mark, and the Sanskrit tupto, which means to beat, strike, leave a mark. These etymologies of the term make clear that type has to do with marking an object or body so that it can belong to a class or a group of things. Discourses on type in architecture emerged in the nineteenth century as a way to classify buildings not so much in terms of their style or image, but in terms of their spatial and structural organization. As is well known, the earliest definition of type in architecture was formulated by Antoine Chrysostome Quatremère de Quincy in his Dictionnaire historique d'architecture (1825). For Quatremère, type represents not an image or a model to be copied, but an idea that can serve as a rule for the model. In spite of this idealist understanding, type as a design tool was prompted by the industrialization of the building process, and the consequent standardization of design and construction which found in mass housing one of its most important manifestations. It was with the rise of mass housing between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that typological design became a method whose goal was not only standardization, but also the subtle imposition of class and gender roles through specific norms and spatial layouts. In the 196os, interest in typology—that is to say, in the discourse on type-reemerged in the writings and studies of architects such as Saverio Muratori and Aldo Rossi." This "third revival" of typology (after its theorization at the beginning of the nineteenth century and its instrumentalization by the modern movement) had a historicist flavor since it was seen as a way to anchor architectural design to the history of the city at large? Rossi's interpretation of typology was influenced by the historian and theorist Giulio Carlo Argan for whom architectural form is inevitably rooted in historical precedents. Even though Rossi emphasized the link between type and economic factors such as property, what many discourses on type seem to have missed is that types are informed not only by ideas, mass production, or historical lineage, but also and especially—by the way political institutions, social relationships, and market forces define ways to occupy space. This is especially true in the case of housing, whose typological resolution has always been the product of class and gender politics…A type is not a model to be copied, but rather the deep structure of buildings; as such, the relevance of the projects presented in this book lies in the way they attempt to rethink the architecture of domestic space not in terms of its image but in terms of its spatial relationships.35

q.Architecture, however-the world of objects created by architecture-is not only described by types, it is also produced through them. If this notion can be accepted, it can be understood why and how the architect identihes his work with a precise type. He is initially trapped by the type because it is the way he knows. Later he can act on it; he can destroy it, transform it, respect it. But he starts from the type. The design process is a way of! bringing the elements of a typology-the idea of a formal structure-into the precise state that characterizes the single work…One of the frequent arguments against typology views it as a "frozen mechanism" that denies change and emphasizes an almost automatic repetition.' However, the very concept of type, as it has been proposed here, implies the idea of change, or of transformation. The architect identifies the type on or with which he is working, but that-does not necessarily imply mechanical reproduction. Of course, the typological approach per se does not demand constant change; and when a type is firmly consolidated, the resultant architectural forms preserve formal features in such a way as to allow works of architecture to be produced by a repetitive process, either an exact one as found in industry, or an approximate one, as found in craftsmanship. But the consisteney and stability of forms in such instances need not be attributed to the concept of typey it is just as possible to conclude that the struggle with an identical problem tends to lead to almost identical forms. Or in other words, stability in a society-stability reflected in activities, techniques, images-is mirrored also in architecture…
Mass production in architecture, focused chiefly on mass housing, permitted architecture to be seen in a new light. Repeatability was desirable, as it was consonant with industry. "The same constructions for the same require-ments," Bruno Taut wrote," and now the word "same" needed to be understood ad litteram. Industry required repetition, series; the new architecture could be pre-cast.Now the word type in its primary and original sense of permitting the exact reproduction of a model-was trans-Normed from an abstraction to a reality in architecture, by virtue of industry; type had become prototype…
The architecture of Rossi initially seems to stand against this discontinuity. For here the unifying formal structure of type disappears. In spite of Rossi's strenuous defense of the concept of type in the construction stage of his work, a subtle formal dissociation occurs and the unity of the formal structure is broken. This dissociation is exemplified in Rossi's house, where the almost wall-like structure of the plan is connected with the pilotis below and the vaulted roof above. There is an almost deliberate provocation in this breakdown and recombination of types. In a highly sophisticated manner, Rossi reminds us of our knowledge-and also our ignorance-of types; they appear broken, but bearing unexpected power. It might be said that a nostalgia for an impossible orthodoxy emerges out of this architecture. In the work of Rossi, and even that of Venturi, a discomforting thought arises: was it not perhaps at the very point when the idea of type became clearly articulated in architectural theory—at the end of the eighteenth century-that the reality of its existence, its traditional operation in history, became finally impossible? Did not the historical awareness of the fact of type in architectural theory forever bar the unity of its practice?…
To understand the question of type is to understand the nature of the architectural object today. It is a question that cannot be avoided. The architectural object can no longer be considered as a single, isolated event because it is bounded by the world that surrounds it as well as by its history. It extends its life to other objects by virtue of its specific architectural condition, thereby establishing a chain of related events in which it is possible to find common formal structures. If architectural objects allow us to speak about both their singleness and their shared features, then the concept of type is of value, although the old definitions must be modified to accommodate an idea of type that can incorporate even the present state, where, in fact, subtle mechanisms of relationship are observable and suggest typological explanations.36

r.프레링거 도서관의 분류, 배치 전략은 다음 세가지 조건에 맞춰 설계됬다. 첫째, 각자 혹은 둘 다 특별히 관심을 둔 영역만 다룬다. 모든 분야를 광범위하게 아우르는 컬렉션을 꾸릴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둘째, 따라서 프레링거 도서관은 미국 의회도서관 분류법이나 듀이 십진분류법과 전혀 맞지 않는다. 예를 들어 예술과 정치를 동시에 논하는 책, 핸드메이드 필름, 자연 문화 인터페이스 담론서, 사회가 청소년을 악마 취급해 온 역사를 다룬 책은 어느 섹션에 들어가야 하는가? 그 밖에도 우리의 수많은 관심 영역이 기존 분류 체계에서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 셋째, 우리는, 특히 나는 연구 과정이 세상을 물리적으로 탐험하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생각한다. 경험에 따르면 창조적이고 지적인 작업은 세상에 직접 뛰어드는 데서 비롯한다. 단순하게는 여행을 떠나 숨겨진 장소를 발견하거나 시골 서점에서 숨겨진 책을 찾아내 손에 넣거나 하는 상황을 떠올려 볼 수 있다...이를테면 서고의 첫 번째 통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발해 동쪽으로 뻗어 나가면서 북미 대륙을 가로질러 북대서양에 도달하는데, 이 경로를 따라 점차 자연사, 자연-문화 인터페이스, 농업, 전원생활, 채굴업 등 경관을 기반으로한 포괄적인 주제가 등장한다. 이렇게 여러 주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도록 틀을 짠 뒤에 섹션마다 다양한 자료를 섞어 두어 '예기치 못한 발견'에 따르는 재미가 증폭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정부 문서와 그것을 해석하는 논문이, 대안적 역사서와 정통 역사서가 서로 이웃한다...책들은 (••)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었고 (••)가장 이상한 점은 바르부르크가 책들을 옮기고 또 옮기는 데 결코 지치는 법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사유 체계에 변화가 생길 때마다, 사실들 간의 연관성에 대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는 책들을 다시 정리했다. 연구법이나 관심사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도서관 역시 변신했다. 규모도 작고 장서도 적었지만 그곳은 맹렬히 살아 있었으며, 바르부르크는 도서관에 인류사와 관련한 제 생각을 최대한 담아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37

r-1.노르웨이에서 진행되는 <미래 도서관〉은 한 세기 동안 매년 비공개 문학 작품을 한 편씩 더해 가는 개념적인 프로젝트다. 해마다 전 세계에서 호명된 작가 1인이 전체 100편으로 구성될 아카이브에 작품 하나를 더하게 된다. 패터슨은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오슬로 북부 숲에 나무 1,000 그루를 심었다. 나무들이 잘 자란다면 100년 뒤 100권의 책을 만드는 데 필요한 종이를 전부 제공해 줄 것이다...부활 도서관 (Reanimation Library)은 뉴욕 기반의 예술가 앤드루 비콘(Andrew Beccone)이 2006년에 설립해 공공에 개방한 이래로 꾸준히 컬렉션 규모를 키워 가고 있는 참고 도서관이다. 서가는 20세기에 발행된 책으로 가득하다. 텍스트에 담긴 정보는 시대에 뒤처졌을지 몰라도 다양한 이미지가 수록돼 시각 자료로서 무척 흥미로운 것들이다. 비콘은 헌책방, 중고품을 내놓은 누군가의 앞마당, 장서를 처분하는 도서관, 쓰레기 더미, 길거리 등지에서 삽화가 실린 '화석' 같은 책들을 발굴해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이런 과정을 거쳐 거의 모든 분야의 책을 망라한, 방대한 이미지 아카이브가 탄생했다. 부활 도서관은 열람실에 스캐너와 복사기를 비치해 이용자가 마음껏 자료를 활용하면서 낡은 콘텐츠로 새로운 성좌를 짜도록 장려한다...20세기 초부터 곳곳에 등장한 이동식 도서관은 마치 당나귀, 낙타, 배, 자동차 혹은 기차를 책들과 조합해 만든 지식의 아상블라주 같았다. 아래 이미지는 1961년 켄터키 길드 열차에 꾸며진 이동식 도서관이다. 열차는 경로를 따라 여러 역에 정차하면서 예술, 공예 분야의 책을 소개했다...브루클린 기반의 《캐비닛 매거진》(Cabinet Magazine) 편집진은 2002년 뉴멕시코 사막 한 구석을 자신들의 영토 '캐비닛의 땅'(Cabinetlandia)으로 선포했다. 2004년에는 샌프란시스코 기반의 예술가 매슈 패스모어(Matthew Passmore)와 합작해 그 땅에 국립 도서관을 세웠다. 도서관 시설은 철제 서류 캐비닛이 전부다. 붙박이장처럼 뒤통수를 반쯤 묻어 놓은 캐비닛 안에는 플라스틱 봉투에 담은 카탈로그, 캐비닛 매거진 과월호, 그리고 천으로 된 간이 의자, 햇볕을 가릴 우산, 미지근한 캔 맥주 등 몇 가지 실용 아이템이 보관돼 있다...오늘날의 독자들은 1890년대라면 SF에나 등장했을 법한 독서 공간과 독서 기기를 일상적으로 접한다. 이제 우리가 어떤 종류의 텍스트든 대체로 컴퓨터, 스마트폰, 전자책 단말기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 읽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터넷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열람실이자 모든 텍스트와 하이퍼텍스트, 모든 지식과 하이퍼지식을 보유한 보르헤스적 도서관을 가장 근접하게 구현한 공간이 됐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흐름 속에서 물리적 도서관을 통째로 가공해 장서를 전부 디지털로 변환하는 대형 프로젝트가 여러 건 진행되고 있다. 구글이 2004년부터 주요 대학 도서관과 제휴를 맺고 진행하는 '구글 도서관 프로젝트'(Google Library Project)가 대표적이다. 그 밖에도 '인터넷 아카이브', 하티트러스트(HathiTrust), '프로젝트 구텐베르크'(Project Gutenberg) 등이 구글이 스캔한 자료를 일부 활용하여 비슷한 실험을 하고 있다. 그중 해적 아카이브인 Arg.org는 전적으로 이용자 커뮤니티의 참여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이례적이다. Arg.org 이용자는 직접 PDF나 전자책 파일을 업로드한 뒤 '인덱스카드'를 작성하고 주제별 서가'를 생성해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다. 이렇듯 Arg.org에서는 도서관을 발전시키고 지속하려는 이용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전면에 드러나는데, 이는 디지털화 공정이 완벽히 자동화되어 매끄럽게 돌아간다는 인상을 주고자 인간이 노동한 흔적을 지워 버리는 구글의 경우와 극명히 대비된다.37-1

r-2.그러나 책 수백만 권을 스캔하는 데는 포드(Ford)식의 반복적인 육체 노동이 필요한데, 이를테면 페이지를 넘기거나 스캐너를 작동시키는 일이 그렇다. 이런 수작업의 증거가 디지털화된 책 안에 숨어들기도 한다. 실수로 스캔본이 흔들리거나 노동자의 손가락이 페이지와 함께 스캔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윌슨은 이렇듯 육체 노동이 '미끄러지며' 남긴 흔적에 관심을 둔다. 그리고 감춰져 있던 생산 노동을 유형의 작업물에 담아 미학적 사건이자 페이지에 도사린 균열로 제시함으로써, 디지털 복제 시대, 실체 없는 디지털 프로세스 안에 인간 존재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한다.37-2

s.문득 캐롤라인에 대한 기억이 떠올랐다. 소년기의 초여름에 다다른 시절이었다. 남반구 끝자락 이국땅 어딘가에서 그녀와 연이 닿은날, 나는 그 이전에 에덴 공원mount. eden에 들렀다. 에덴 공원은 그 이름답게 잘 다듬어진 잔디 민둥산 윗자락에 신화적인 나무 한그루가 서있었는데 나는 그 언덕 위에 내리는 따가운 햇빛과 그 나무 아래 드리운 그늘의 스산함을 동시에 기억한다. 이 서늘함을 나는 단순히 나무 그늘아래에서만이 아닌, 그곳에 뿌리내린 사람들의 그늘에서, 그곳에 뿌리내릴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그늘에서, 뿌리를 거세당한 사람들의 그늘 곳곳에서 직감적으로 느꼈다.  나는 그곳에서 일년간 춥지도, 그렇다고 마냥 덥지도 않은 낯선 계절을 캐롤라인 아주머니와 보냈다.

t.7월경에는 그 유명한 파리오의 경기가 실시되어 이 돌말뚝의 외측을 시계방향으로 말이 달린다. 관상(觀象)은 광장의 안쪽과 팔라초 퍼브리코 앞에 설치된 자리에서 보는 것 외에도 건물의 창이란 창에 모두 모여 성원을 보낸다. 공간으로서 재미있게 생각되는 것은 건물의 외벽이 파리오 때에는 아리나의 안쪽으로 가역(可逆)된다는 것이다. 마치 지갑을 뒤집어서 안쪽을 밖으로 냈을 때와 같다. 일상의 시에나는 차분한 시가로서 이 캄포광장에는 많은 비둘기가 모이고 작은 노점상도 보인다. 그리고 돌의 포장은 완벽하지만 한 그루의 나무도 없는 것은 놀라우며, 말뚝 안쪽의 대공간은 바로 보행자들의 천국으로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것은 즐거운 경험이다.38

u-1.1장 연기 없이 타는 불-이제 기술 매체는 예술의 도구에서 벗어나 예술을 견인했을 뿐 만 아니라, 본격적으로 사회•정치적 변화까지 이끌어 내기 시작했다. 테크네가 귀환한 것이다. 포스트-테크네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이제 발광하는 스크린(표면적 표현 형식)을 끄고, 검은 화면(실체적 구조)을 봐야 할 때다. 기술의 ‘억압적인 의지’를 숨긴 채 반짝이고 있는 발광체를 끄고, 블랙 미러의 실체와 그곳에 비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봐야 할 때다.
2장 미래의 침묵-우선, 인간 없는 세상에서 인공지능은 작동 가능한가? 작동 가능하다면 인공지능이 예술의 감상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인공지능의 예술 창작 딥러닝을 위한 빅데이터의 원재료인 인간의 예술 작품이 더는 창작되지 않을 때(인간이 세상에 없을 때), 인공지능은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새로운 데이터가 입력되지 않을 때, 작품의 다양성이 한계에 도달히여 어떤 패턴으로 무한 반복 제작되지 않겠는가? 이러한 의문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한가지다. 바로 ‘과연 기계는 욕망하는가?’
3장 기계 속의 유령-유켈리스는 1969년 [메인터넌스 아트를 위한 선언문 1969]에서 "혁명 후, 월요일 아침에 쓰레기를 청소할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질문한다. 혁명은 중요하다. 하지만 혁명이 전부는 아니다. 그동안 제도비판미술은 역사화하고 우상화하는 미술의 이데올로기적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은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작품과 행위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러한 역사적 미술 행동은 디지털-인터넷 기술 시스템이 조직하고 있는 자동화라는 이데올로기를 분석하여 그 내부의 작동방식을 감지할 수 있도록 시야를 넓혀준다. 디지털-인터넷 혁명 이후에도 누군가는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청소를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여전히 사람이다
4장 코로나19 블랙홀-우리는 강제로 도착한 미래를 살고 있다. 서서히 진행되던 원격시대를 코로나19는 강제적으로 우리의 턱 밑에 끌어 다 놓았다. 그리고 이렇게 먼저 도착한 미래를 과거로 다시 되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39-1

u-2.1장 태양과 바다와 인류세, 그리고 물질생태미학-인류세라는 개념이 근대성의 전략적인 권력관계와 생산관계에 새겨진 자연화된 불평등과 소외, 폭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들 관계에 관해 생각하도록 전혀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불평등, 상품화, 제국주의, 가부장제, 인종적 구성체. 그리고 그 밖의 많은 것은 대체로 고려되지 않는다. 기껏해야, 문제의 틀을 잡는 작업에 대한 사후 첨가물" 로 인식될 뿐이다. 이러한 무어의 지적은 인류세가 단순히 환경오염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근대의 작동 방식이 실패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희망의 미래를 위해 궁구할 일은 인간의 성장력을 지우려 하거나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기술-사회-자연 의 뒤섞이고 이질적인 전선들 전체 위에서 접합}한 새로운 테크노-생태 실천을 도모하는 일이리라. 그리고 이 구절의 각주에 따르면 "가타리는 세 가지 사회적 생태철학'의 비전을 갖고, 생태계(자연) 사회 개인(주체) 준거세계, 기계권(과학기술의 인공계) 사이 상호작용을 횡단해 생태학적 사유와 실천을 꾀 할 것을 요청했다"라고 적고 있다.
3장 사막에 피어난 예술, 에술로 들어온 재난-버닝맨에는 10가지의 원칙, 혹은 신념이 존재한다. 근본적 포괄성, 나눔, 비상업화, 근본적 믿음과 자 립, 근본적 자기표현, 공동의 노력, 시민의 책임 의식, 흔적 남기지 않기, 참여, 즉시성. 이러한 열 가지 원칙 에 따라 버너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9일간 실험적인 생활을 한 다. 그들은 예술, 파티, 요리, 탐험, 명상, 종교, 스타트업, LGBT 등 특정한 주제를 기반으로 테마 캠프를 만들고 이렇게 여러 개의 캠프를 모아 빌리지를 형성한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전체 캠프를 대표하는 시장을 선출하기까지 한다. 버너들은 9일간 이상적 도시를 구축하는 것이다.39-2

u-3.4장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사실상 오늘의 미술은 미래주의가 선취했던 “대중의 취향에 따귀를 때려라”라는 행동 강령을 실천하며 개취(개인 취향)적이고 현취적이면서도 키치적이고 마취적인 모습을 보인다.39-3

u-4.다다익선은 빅데이터의 미덕이다. 이런 다타이즘 데이터주의 시대에 빅데이터는 아카이브 충동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현 재진행형인 역사의 기록 속에서 아카이브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세상의 모든 것을 모아 세상의 의미를 밝히려는 듯 아카이브 체제는 잠들 줄 모른다…거대한 데이터 뭉치인 빅데이터는 On(1)과 Off(0)의 이진 신호 체계를 사용하는 디지털이다. 이 디지털은 과거의 아날로그 정보를 모두 흡수하고 있을 뿐 아니라-음성, 소리, 노래 등 청각 자료와 사진, 그림 등의 시각 자료, 그리고 여러 문서로 남겨진 텍스트 자료 등 과거의 아날로그 매체 자료를 디지털로 전환하고 있다- 방대한 자료를 모아 학습하여 '판단할 수 있는 인공지능' 으로 변하고 있다. 인류 문명이 디지털로 전환되고 있으며, 디지털 알고리즘이 이것을 관리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한 이진 신호 뭉치가 카멜레온처럼 번역 불가 능한 어떤 형태로 변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지금까지의 역사는 송두리째 없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아버지(절대적 가치)가 사라져버린 어느 날(포스트모던 시대) 자녀들(주체)은 흥에 겨워 놀았지만, 밤(불면의 시간)이 다가오자 그들은 자신이 누구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포스트모던 시대는 너무 늙었다. 모더니즘의 권위를 지워내며, 상대성의 깃발 아래 혼성, 모방, 다원, 주변 등을 앞세웠던 포스트모던 시대는 차이와 다양성이 상대주의적 개별성이 되면 서 서로 소통 불가능해져 버렸고, 폭력적 기제일 뿐인 보편성과 책임지지 않는 탈중심적 존재로서의 주체만 앙상하게 남았 다. 반면, 신자유주의에 힘입어, 전 세계적인 네트워크 구축과 디지털 기술의 발달, 확산은 디지털 절대왕정 시대를 만들어 가고 있다.39-4

v.건물은 지어지는 순간부터 풍화 (weathering : 지표를 구성하는 바위, 돌따위가 햇빛, 공기, 물 등의 작용으로 점차 파괴되고 부서지는 현상]라는 과정을 통해 퇴화하고 소멸에 이른다. 비와 바람, 더위와 추위는 건물의 풍화 작용을 재촉한다. 돌, 벽돌, 나무처럼 오랫동안 건축 재료로 쓰던 것들은 풍화되어 자연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근대 이후 공장에서 생산된 재료들은 자연에서 쉽게 변형되거나 소멸 되지 않는다. [도시의 이미지(The Image ofthe City)] (1960 년)라는 저작으로 유명한 케빈 린치(Kewin Lpack. 1918~19) 교수의 마지막 작업은 [웨이스팅 어웨이(Wasting Away)] (1990년) 다. 이 책은 폐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웰빙(well-being)과 마찬가지로 웰다잉(well-dying) 이 중요한 것처럼 도시 환경과 건물을 제대로 폐기(wasting well) 할 수 있도록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모스타파비 (Mohscn Mostafavi, 1954~)는 레더배로우(David Leatherbarrow. 1953~)와 함께 쓴 책 [온 웨더링(On Weathering : The Life of Buildings in Time)] (1993년)에서 건축의 풍화와 시간 속의 건축을 이야 기한다. 건물은 완성되어 사용하면서부터 기후의 영향으로 천천히 낡아 가기 때문에 건축의 목표는 이 피할 수 없는 과정 에서 (기술을 통하여) 가능한 한 풍화를 지연시키며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노화를 자연스럽게 보이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어진 질문에 정답(correct answer)을 고르는 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서로 응답(response)하는 일, 응답으로 질문을 이어 나가는 일이 아닐까. 제각각 해법은 다 르지만 본바탕은 하나로 연결되는, 도시 주택에 대한 질문과 답의 과정을 생각해 보는 지면이 되기를 기대한다.
P318. 기존의 이화마을 배치도(왼쪽), 건설사에서 고층으로 재개발하고자 한 안(가운데), 이화마을 재개발 단지가 그렇듯 옛길과 땅의 형상이 완전히 사라진다.[이화마을 재개발 정비 모델 배치도](오른쪽과 아래), 조성룡도시건축+기용 건축, 2007년. 서향이던 집들을 남향 아파트로 정리했다. 동과 동 사이에 마을의 옛길을 모두 살렸다.40 Q:길을 둘러싼 풍경이 이미 모두 달라졌을텐데, 길을 두고 마주하는 집들, 길의 모퉁이, 꺾인 담장, 담장 너머 나온 감나무, 이 모든게 사라진 채 길의 위치만 그대로 남는다면 옛길을 살린게 맞는걸까?

w.여러 방면으로 이 실험은 환자를 위한 방이 일반적인 방과 달라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켰다. 그 차이는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일반적인 방은 수직적 인간을 위한 방이다. 병실은 수평적 인간을 위한 방이고, 이를 염두에 두고 색상, 조명, 난방 등이 그에 알맞게 디자인 되어야한다.41

x.합리적인 평면, 감동적인 단면

y.근대 사회는 자신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서 인간의 형상을 정의하고 그 형상을 특정 유형의 집단적 정체성으로 대량생산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인간됨의 근대적 생산양식’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텐데, 휴먼 스케일이란 그 생산양식이 양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이상적 형상을 의미한다. 따라서 휴먼 스케일은 이 생산양식의 설계 과정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점하면서, 미래의 향방을 놓고 벌어지는 다양한 정치적 경쟁에 노출된다. 상이한 미래들은 각기 다른 휴먼 스케일을 꿈꾸기 때문이다.42

z.오늘날의 서울이 1963년에야 지금의 형태를 띠게 된 것처럼, 현재 서울의 역사라는 것도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와 같은 형태를 띤 서울특별시는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기 때문에, <올바른 서울 역사>란 것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이렇게 서울을 보는 방법을 깨닫자, 서울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서울긔 곳곳에 켜켜이 쌓여 있는 여러 시간의 겹, 바꾸어 말하자면 땅의 층인 지층(地層)이 아닌 시간의 층인 시층(時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처럼 시간의 층이 확인되는 공간을 <삼문화광장>이라고 부릅니다. <삼문화광장>은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 있는 틀라텔롤코 광장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곳에 서면 아스텍 시대, 에스파냐 식민지 시대, 그리고 현대의 건축을 한자리에 볼 수 있기에 <세 문화 광장 plaza de las tres culturas>이라고 하는 것입니다...오늘날, 지혜로운 도시 탐험가들은 도시에서 노는 법을 여럿 개발했습니다. 지하철역이나 백화점의 대리석 벽면에 박혀 있는 암모나이트 등의 화석을 찾아내는 도시 화석 탐사, 폭우를 대비해서 지하에 건설된 대규모 집수조 등을 둘러보는 도시 속 거대 시설 탐사, 폐허가 된 건물이나 시설을 둘러보는 폐허 탐사, 예전에 철길이 놓여 있던 경의중앙선의 지상 구간이나 경춘선의 폐선 구간을 걷는 폐선 답사 등이 대표적인 도시 탐사 방법입니다. 그 가운데 저는 아파트 단지의 골목들을, 마치 밀림을 탐험하는 모험가의 마음으로 돌아다니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잠실 석촌동을 방문했던 1981년 가을은 한창 강남 개발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백제 왕릉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포클레인에 잘려 나가고 백제 지배층의 분묘들이 삽날에 찍혀 인골이 나뒹굴고 있는 현장은 마치 전쟁터 같은 참혹한 광경이었다.43

a.인간을 디자인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모든 이론은 인간이 늘 구심점이었다고 말해왔지만, 실제로는 인간을 재발명해왔다.

인간의 모든 다양성, 신비로움, 복잡함, 기묘함이 하나의 매끄러운 윤곽선으로 대체된다. 지나치게 인간적이라고 여겨지는 바로 그러한 것들 즉 심리, 목소리, 얼굴, 표정, 호흡, 체온, 리듬, 비대칭성, 땀, 다공성, 감정기복, 어색함은 인간의 외부 경계를 표시하는 단호한 선에 의해 사라진다…그림 속 벌거벗은 인물은 그를 둘러싼 도형 안에 있을 뿐, 다른 배경은 없다. 그림 속 도형이 인물의 움직임에 의해 정의되는지, 혹은 이 도형이 인물을 제한하는 것인지, 그리고 이 그림이 디자인을 인간의 신체를 감싸는 첫 번째 요소라고 주장하는 것인지 혹은 인간이 원이나 사각형의 중심에 서도록 강요받은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확실한 건 도형이 제약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다…이 모델에 근거하여, 고전 건축은 인간이 완벽해진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일종의 거울이 되었다. 비트루비우스는 '완벽한 건물들'의 비율이 인간 신체의 비율을 (측량체계 및 수학과 더불어) 기초로 하여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건축을 바라보면서 이상적인 인체 비율에 깃든 우주의 공명을 느끼도록 의도했지만, 정작 이 비율은 실제 인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기에 이상적인 것이다…이후 규범화된 신체를 지녔으며 기하학에 둘러싸인 윤곽선 인물의 또 다른 변형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에는 인간의 신경계를 닮은 인공두뇌학 피드백 회로 속에서 등장했고, 1960년대에는 인체의 모든 혈관과 장기의 복잡한 상태를 연상시키는 우주비행사를 위한 생명 유지 배관장치에서, 1980년대에는 인체 내부와 외부 사이의 에너지 흐름에서, 그리고 오늘날에는 바이오피드백 회로에서 변형 인물들이 출현하고 있다…삶의 모든 영역에서 옷과 화장과 면도, 헤어스타일, 매니큐어, 장신구, 식습관, 자세, 걸음걸이, 운동을 통한 개인의 끝없는 자기변형과 대조를 이루는 듯한 인간 육체에 대한 규율이 존재한다. 매끄러운 윤곽선은 일상에서도 신체의 불안정한 경계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기 시작한다. 인간을 상징하는 윤곽선은 새로운 표준인간의 이미지와 함께 자기복원의 공간을 차지한다. 마치 장비와 공간의 디자인이 이 인물을 위해 더욱 발전하고, 잘 재단된 옷처럼 제공되는 듯하다. 하지만 기본 체형, 도식적인 윤곽선은 그야말로 디자인의 산물이다. 디자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는 인체는 절대로 순수한 상태가 아니다. 인체는 디자인된 것이다.

그로부터 수천 년 후, 터키 차탈회위크(atalhoyuk 같은 초기 도시에서는 최대 30구의 시신이 각각 사각형 주택 바닥에 매장된 채 건축의 통합적 요소로 간주되었다. 아돌프 로스가 1910년 시신이 매장된 흙더미를 건축의 원초적 지표로 사용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죽음의 디자인은 계속해서 진화한다.

“미키마우스는 한 생명체가 인간과 그 어떤 유사점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음을 증명한다. 그는 인간을 정점에 두는 모든 생명종 사이의 위계질서를 뒤흔든다…이 영화들의 큰 인기는 기계화, 이들의 형태, 혹은 오해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대중이 그 안에서 생명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발터 벤야민

2014년 인공지능이 이 같은 질문에 답할 수 있게 되자 새로운 시스템이 소개되었다. 이 시스템은 짤막하지만 놀라운 문장을 확인하도록 요구한다. "나는 로봇이 아닙니다." 당신의 대답이 중요한 게 아니다. 자체 조절 프로그램은 당신이 클릭하기 전후에 페이지에 주어진 내용, 그리고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지를 관찰하여 당신이 인간인지 아닌지를 판별한다. 너무나 인간적인 기계들과 로봇처럼 행동하는 인간들이 각축전을 벌이는 내용의 책과 영화, 드라마 속 실존의 딜레마가 이제 일상에서 재현되고 있다.

“나의 꿈은 사람들이 쓸모없는 프로젝트를 위한 작업을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무쓸모의 프로젝트들이 새로운 개념을 품고 있다.”-찰스 임스 44

b.밤의 고층 건물들 위^교회 십자가들, 네온 불빛으로 가장자리를 두르고^빨갛게, 노랑게, 하얗게, 디즈니-^천국, 열려 있다^24시간
Über den nächtlichen hochhausblöcken^christuskreuze, neonlichtumrandet^in rot, gelb, weiß, ein Disney-^himmel, geöffnet^rund um die uhr 45

c.하지만 저는 리서치와 그 단어에 관한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네요. 만약 이 단어가 너무 많은 의미를 포함하도록 확장해버리면, 그 단어를 사용하는 데에 더 이상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읽었던 적이 있어요. 만약 “모든 것이 예술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카테고리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꽃은 가장 호화로운 봄이 오래 방치된 증거, 순수하고도 무성한 과실이 미처 날뛰어 버린 것이다 46

d-1.돌이켜보면 우리는 근대라는 인본주의적 자기 참조의 시대로부터 포스트모던의 역사 참조와 일상 참조의 시대를 거쳤었고, 인스타그램과 핀터레스트라는 이미지 과잉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근본 없는 무한참조 혹은 비참조의 시대로 진입한 것이 사실인 것 같기는 하다. 젊은 세대들에게 역사적 전거는 더 이상 시대 배경과 함께 시간순으로 읽히지 않고 그것들은 그저 오늘날의 건축 이미지들과 동등한 선상에서 무작위로 나열되어 읽힌다...그런데 모든 문화 정보를 계보학적으로 파괴시켜보겠다는 비참조건축 주창자의 태도는 니체의 태도를 닮고자 하며 그를 인용하기까지 하면서도, 이상하게 순수주의 태도 혹은 건축 순혈주의 태도와 더욱 가까워 보인다. 사실, ‘장식은 범죄다’라거나 ‘덜한 것이 더 한 것이다’라는 근대 건축의 자기참조적 순수주의 모토를, 지나온 역사와 문화 전반으로 적용하며 문화정보를 소거해가다보면, 이 태도들이 비참조건축이 주창하는 그 태도와 무척 가까워짐을 알 수 있다...그런데 순수주의의 가까운 원조는 퓨리즘(Purism)으로서 이 태도는 앞서 언급한 1, 2차 세계대전 사이의 전간기 시대에 등장했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 정서가 우려스럽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 매너리즘은 외부로의 탈출을 욕망하거나 선망하기보다는 과거와 오늘을 의심의 눈으로 재탐색하고 그 균열의 틈을 확보하며 재번역하여 이를 발판 삼아 새로운 지반을 얻고자 내부에 머무르는 것이지 내부에 미련이 있거나 내부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6. 매너리즘은 상상력보다는 파상력(破像力)을 보다 높은 가치로 위치시키에 그러하다.
8. 따라서 매너리스트는 좀처럼 환영받지 못하고, 승전의 소식을 듣기보다는 종종 패전의 잔해 속에서 상념에 잠긴 멜랑꼴리아와도 닮아 있다.
11.그렇기에 매너리스트는 판단보다는 판단 유예의 성향이 있으며, 지식인의 태도보다는 범속성과 그것의 리얼리즘을 존중하니 교양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문화사나 예술사보다는 차라리 문명사, 인류사의 관점을 공유하지만, 공리주의나 실용주의적 태도와도 일정한 거리를 둔다. 47-1

d-2.첫번째 테제: 건축가들은 건축 역사와 결함 있는 관계를 맺고 있다. 두번째 테제: 20세기는 공간 디자인의 시대였다. 세번째 테제: 형태는 물질적 세계에서 불가피하다. 네번째 테제: 우리는 절충주의에 빠져 있다. 다섯번째 테제: 우리는 시간 디자인의 세기에 접어들고 있다.
건축은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모든 것의 관계로 이해되어야 한다...무엇을 제공하기보다는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존재해야 한다. 건축은 결코 하나의 결과가 아닌, 항상 진행 중인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한편 건축가들은 여전히 계속해서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 건물을 설계하고 토론하고 있다. 47-2

e.사진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사진으로는 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대체 무엇일까. 사진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허나 대단한 것에 관해 이야기할 수는 있을 것이다...비극으로 삶을 마감했던 독일의 문예비평가가 말했다던가. 지금의 문맹은 글을 읽지 못함이지만, 미래의 문맹은 이미지를 읽지 못함일 거라고. 지금이 바로 그 미래다.

e-1.사진이라는 털:...여기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간명하다. 하나, 털은 몸통이 아니다. 둘, 하지만 털은 몸통을 암시한다. 셋, 털에 만족하지 않고, 몸통까지 애무하다간 다치는 수가 있다. 넷, 그렇다고 털에만 집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이 네가지 교훈에서 털을 ‘사진’으로, 몸통을 ‘세상’으로 치환하면 앞으로 내가 할 얘긴 모두 정리가 되는 셈이다...사진이 보여줄 구 있는 건, 딱 그만큼. 몸통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은, 오롯이 그대의 몫. 사진은 털일 뿐, 오해하지 말자!48

f.핵심은 이것이다. 세계 어디에서나 교통에서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다른 분야보다 더 빠르게 증가해 왔다. 개발 방향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이 추세가 뒤집힐 것이라고 전망하기는 어렵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이것은 이동에 대한 열망이 기후위기를 악화시키는 가장 융요한 원인으로 꼽힐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유럽조차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은 교통은 지금까지 비난이 집중되었던 석탄화력만큼, 또는 그보다 더 중요한 배출원이 될 가능성의 증거로 보인다.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교통의 지속가능성이 의심스러운 현실에서 나는 이동의 위기를 본다.49

g....무엇이냐 하면 <친밀함의 수준>이다. 근접성과 거리의 문제이다. 고전주의 건축가라면 스케일이라고 하겠지만 그 말은 너무 학구적이다. 나는 스케일이나 치수보다 좀 더 구체적인 갓을 말하고 싶다...지나가는 사람을 근사하게 보여주는 높고 슬림한 문, 특정한 형태가 없는 평범하고 넓은 문, 지나가는 사람을 위풍당당하게 보여주는 위압적이고 웅장한 정문. 모두가 사물의 크기, 매스, 중력과 관련이 있다. 두꺼운 문과 얇은 문. 얇은 벽과 두꺼운 벽...나는 실내의 형태, 텅 빈 실내가 외부의 형태와 동일하지 않은 건물을 만들려고 노력한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선을 그려서 평면도를 완성하고는 여기가 12cm 두께의 벽체이고 실내와 실외가 이렇게 구별된다는 식으로 하고 싶지 않다. 실내가 여태컷 인식하지 못한 숨은 매스로 느껴지는 공간, 이런 것을 원한다.50

h.케홀름에게 가구는 그저 방에 늘어놓는 물건이 아니다. 가구는 공간을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매개체이며, 가구를 디자인하는 일은 곧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케홀름의 가구와 그것이 속한 공간은 서로 닮아 있다. 명쾌하고, 논리적이며, 철저히 계산되어 있다. 꼭 필요한 크기, 구조, 형태, 비율만을 갖추고 있고, 불필요한 것은 전부 제거되어 있다. 올곧고 직선적인 느낌의 가구들은 자연스럽게 오와 열을 맞춰 배치되어 공간에 반듯한 질서를 정립한다...폴 케홀룸의 가구는 공공성을 띤다. 재료의 본질에 집중하여 최소화된 구조를 갖춘 그의 가구들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고 간결하다. 이러한 특성 덕분에 케홀름의 가구는 공공장소에서 자주 사용된다. 시청, 호텔, 로비, 공항 라운지 등, 어디에서든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스타일 이상의 가치를 전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올바른 디자이너의 자세라고 여기며, 상업성을 높이기 위해 상투적인 디자인을 복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선택은 수많은 함정과 오류가 도사리는 가시밭길과 다름없었지만, 케홀름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그 길이 아니고서는 ‘아름다움’을 지켜낼 수 없기 때문이다...또한 베그너는 가구 디자이너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나는 항상 보통 사람들의 형편에 맞는, 특별할 정도로 높은 품질의 특별하지 않은 것들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 그의 사회적 정신은 북유럽 디자인 특유의 민주적 성향을 대변한다..“마치 젖은 찰흙을 우리가 원하는 형태로 빚어 굳히듯이, 어떤 주어진 물질에 그 물질의 본성에서 비롯되지 않은 선결된 형태를 부여한다면 그 형태는 기계적이다. 반면, 유기적인 형태는 선천적이다. 그것은 물질의 내부로부터 스스로 발달하며 갖춰지고, 그 발달이 완전해짐과 동시에 외적 형태가 완성된다. 생명이 그러하듯, 형태도 그렇다.”  땅속의 대리석과 숲의 나무, 평원의 소는 반짝거리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테이블 상판이나 의자 시트의 형태로 변화시킬 때 매트한 표면을 부여하는 것은 재료 고유의 성질을 표현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인 것이다.51














1.현대성의 위기와 건축의 파노라마, 탈 카미너(Tahl Kaminer) 저, 조순익 역, 서울 시공문화사 
2.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의 사람들(미래의 고고학자편), 히메네스 라이(Jimenez Lai) 저, 김윤범 역, 픽셀하우스
3.이십세기 집합주택, 근대 공동주거 백 년의 역사, 손세관 저, 열화당

4.롤랑바르트 평전 & 텍스트의 즐거움(Le)plaisir du texte, 롤랑 바르트(Rolan Barthes)  저, 김희영 역, 동문선

5.김종성 구술집, 채록연구 최원준, 전봉희, 우동선, 남성택, 마티

6.오늘의 건축을 규명하다-건축의 현재 상태에 대한 상세설명, 자크 뤼캉(Jacque Lucan) 저, 남성택 역, 스페이스 타임

7.초현실주의 미술, S.알렉산드리안 저, 이대일 역, 열화당

8.사진이란 이름의 욕망 기계, 장정민 저, IANN BOOKS

9.아돌프 로스의 건축예술, 아돌프 로스 저, 오공훈 역, 안그라픽스

10.레미제라블, 빅토르 위고 저, 정기수 역, 민음사

11.귀불, 박용규저 , 서울문화인쇄

12.사로잡힌 돌, 김영글 저

13.인터페이스 연대기, 박해천 저, 디자인플럭스

13-1.디자인의 모델링 인터페이스: 투시도법과 CAD프로그램

13-2.스크린, 디자인의 숭고한 대상

14.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올라브 하우게 저, 임선기 역, 봄날의 책(세계시인선 1)

15.우주 감각 NASA 57년의 이미지들, 이영준 저, 워크룸 프레스

16.강물에 떠내려가는 7인의 사무라이, 정영문 저, 워크룸 프레스

17.negotiating ungers the aesthetics of sustainability the solar house, common room

18.파르마코-AI, K 알라도맥다월 & GPT-3 저, 이계성 역, 작업실유령

19.미륵-운주사 천불천탑의 용화세계, 요헨 힐트만 저, 이경재, 위상복, 김경연 역, 학고재

20.예술적 원칙에 따른 도시설계, 카밀로 지테 저, 김기준 역, 미진사

21.에피 16호 장애와 테크놀로지-<아빌리파이, 매드프라이드, 그리고 화학적 사이보그>, 유기훈 저, 이음

22.정크스페이스, 렘 콜하스 저, 임경규 역, 문학과 지성사

23.오프모던의 건축, 스베틀라나 보임 저, 김수환 역, 문학과 지성사

24.아키라우터 3권-건축의 도시, 도시도 건축이다, 남성택 저, 한양대학교 출판부

25.Pier Vittorio Aureli,Interviewed by 0300TV-DOGMA, representation as a channel for creativity, ARQ ediciones

26.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저, 김인순 역, 열린책들

27.라마와의 랑데부, 아서 C.클라크 저, 박성준 역, 아작

28.Axt 050+1호, (주)은행나무출판사

29.건축과 기후윤리, 백진 저, 김한영 역, 이유출판

30.비참조적 건축, 발레리오 올지아티&마르쿠스 브아리트슈미트 저, 강신&박하윤 역, Hoi-publishing

31&32.무기여 잘 있거라,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 김성곤 역, 시공사&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  장결렬 역, 시공사

33.눈먼 갤러리스트, 요한 쾨닉 저, 이보영 역, 열화당

34.인간 실격, 다자이 오사무 저, 유숙자 역, 문학과 지성사

35.DOGMA LIVING AND WORKING, Pier Vittorio Aureli and Martino Tattara, MIT Press

36.OPPOSITIONS-On Typology, Rafael Moneo, MIT Press

37.도서관 환상들, 아나소피 스프링어 & 에티엔 튀르팽 저, 김이재 역, 만일

37-1.리딩 룸 리딩 머신

37-2.앤드루 노먼 윌슨:스캡옵스(ScanOps) 2012-2014

38.건축의 외부공간, 아시하라 요시노부 저, 김정동 역, 기문당

39.불타는 유토피아, 안진국 저, 갈무리

39-1.1부 낮달 / 39-2.2부 미래의 침묵 / 39-3.3부 둔갑술 / 39-4.4부 불면증

40.아주까리 수첩-조성룡 우리가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건축과 풍화 urban weathering, 심세중 역, 수류산방

41.몸부림 메뉴스크립트 04: 알바 알토-건축의 인간화(테크놀로지 리뷰 1940년 11월호), 에로시스

42.휴먼스케일, 고나무, 김형진, 노정태, 박해천, 배홍철, 복도훈, 윤원화, 현시원 저, 워크룸 프레스&일민미술관

43.서울선언:문헌학자 김시덕의 서울 걷기, 2002~2018, 김시덕 저, 열린 책들

44.우리는 인간인가? 디자인-인간의 고고학, 베아트리츠 콜로미나 & 마크 위글리 저, 정현우 역, 미진사

45.은엉겅퀴 , 라이너 쿤테 저, 전영애 박세인 역, 봄날의 책  서울의 선교(mission in seoul)

46.리서치란 무엇인가 , 피터 밀러 저, 박유선 박지윤 역, 플레인앤버티컬

47.건축잡지 미로[1] 참조와 인용 2024 가을 / 겨울

47-1.자기 참조 이후의 건축, 김광수 저

47-2.공간 디자인에서 시간 디자인으로-현대 건축에 관한 다섯 가지 테제, 송률, 크리스티안 슈바이처 저

48.사진의 털 노순택 사진 에세이, 노순택 저, 씨네북스

49.납치된 도시에서 길찾기, 전현우 저, 민음사

50.페터 춤토르 분위기, 페터 춤토르 저, 장택수 역, 박창현 감수, 나무생각

51.Poul Kjaerholm, 아넥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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